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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훈민] 전해줄게

 이민혁은 동성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언제나 밝고 활발한 데다 사교성도 좋아 교실 내 모든 아이들과 친했고, 모두 이민혁을 좋아했다. 반면에 나는 친구라고는 이민혁 하나밖에 없었다. 다행인 건, 이민혁도 나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이민혁과 나는 소위 불알친구였는데, 그래서 우리는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자연스러웠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랬다. 이민혁은 자연스럽게 나와 가까워졌고, 자연스럽게 나의 반쪽을 가져갔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런 이민혁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전해줄게

일민/훈민, 일훈민혁










 모든 학생들이 가장 기다린다는 점심시간 종이 울렸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바로 달려나갈 수 없었다. 민영이랑 같이 가야 돼. 이민혁의 말 때문이었다. 이민혁이 나를 잡아끌면 나는 그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식당에 가려면 내려가야 했지만 우리는 한 층 위인 오 층으로 향했다. 사실 오 층은 남학생이 올라올 일이 없어 거의 금남의 구역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민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서더니 삼 반으로 곧장 걸어가 민영아! 하고 제 여자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 애는 혼자 앉아있다가 이민혁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일어섰고, 다가오는 그 애를 이민혁은 활짝 웃으며 반겼다. 일훈아 안녕, 이민혁의 옆에 조용히 서 있기만 하던 내게 그 애는 살짝 손을 들어 인사했지만 나는 어, 한 글자만 툭 던지고 몸을 돌렸다. 가자. 그래. 뒤에서 이민혁과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민혁은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되어서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한다며 밥을 평소 먹는 양의 반만 받았다. 여자친구가 받은 것과 비슷한 양이었다. 나란히 앉아 나란히 젓가락을 들어 깨작거리는 둘을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는데 이민혁의 여자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가 싱긋, 소리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상큼하게 웃었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민영이는 너랑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이민혁이 했던 말이 생각나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다. 지가 뭔데 나랑 친구하고 싶어 해. 그때 만약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었더라면 나는 보나 마나 이렇게 답했을 거다. 이민혁의 여자친구는 마음에 안 들었다. 이민혁의 짝사랑 일 년을 지켜보면서도 이민혁이 저런 애를 왜 좋아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겉모습이야 예쁘고 귀여웠지만 사실 뜯어보면 큰 눈은 렌즈와 아이라인, 잡티 하나 없는 피부는 비비크림, 보기 좋게 붉은 입술은 틴트 덕분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게다가 치마나 블라우스도 짧게 줄여 입고 다녔고, 성격 싸가지없기로 유명해 친구도 없었다. 공부도 더럽게 못했다. 물론 나도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은 갔고, 이민혁은 전교에서도 상위권이었다. 여하튼 이민혁의 여자친구는 어느 무엇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외모 그거 딱 삼 개월 간다? 게다가 걔는 성격 안 좋기로 유명하잖아. 내가 대놓고 까도 이민혁은 꿈쩍도 안 했다.



 “…… 일훈아!”

 “어?”



 이민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와 눈을 마주친 이민혁이 말했다. 아냐, 그냥 좀. 멋쩍은 듯 대답했더니 이민혁은 민영이가 한 말 못 들었어? 하고 물어왔다. 기분이 더 나빠졌다. …어.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방금 전과 한참 달랐지만 그 애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내게 말을 걸었다. 너는 여자친구 안 만들어?



 “어.”

 “왜?”

 “내 맘이지.”



 대놓고 대화하기 싫은 티를 냈지만 그 애는 굴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 친구 소개시켜 줄까? 라고 묻기까지 했다.



 “친구가 있기는 하냐.”

 “…야, 너 왜 그래.”



 눈치 없이 자꾸 말을 거는 바람에 짜증이 나 생각나는 대로 내뱉어 버렸더니 기어코 이민혁이 한마디 했다. 아, 몰라. 나 먼저 간다. 이민혁의 여자친구는 내게 무언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일어섰다. 식판을 들고 그대로 등을 돌리자 이민혁이 당황한 듯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를 붙잡는 손은 없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민혁은 제 여자친구를 위로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교실이 아닌 미술실로 향했다. 사실 사용하는 미술실은 아니고 새 건물을 만들면서 비워진 곳이었는데, 일 학년 때 이민혁과 내가 정한 일종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선생들 몰래 자물쇠를 부수고 우리가 산 자물쇠를 건 다음 우리끼리만 열쇠를 나눠 가졌었기 때문에 나와 이민혁 외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익숙하게 문을 따고 들어가 앞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았다. 내 친구 소개시켜 줄까? 조용한 곳에 혼자 있자니 아까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친구가 있기는 하냐.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민혁이 그 일로 화를 낼까 조금 걱정되긴 했다. 이민혁의 여자친구에 대해 안 좋게 말한 게 한두 번도 아니긴 하지만.



 “역시 여기 있었구나.”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곧이어 이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마주 보는 자리에 주저앉은 이민혁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화난 눈빛은 아니었다. 안 미안하냐? 이민혁이 물었다. 역시나, 그래도 여자친구 편이구나. 사실이잖아. 기분이 나빠져 퉁명스레 대답했더니 이민혁이 피식 웃었다.



 “그거 말고. 나 버리고 먼저 간 거.”



 …어? 잘못 들었나 하고 멍하니 있었더니 이민혁이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적어도 앞으론 그러지 말라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왜 내가 한 말에 화 안 내? 내가 묻자 이민혁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 가지고 화낼 사이는 아니지, 우리가.



 “야, 근데 나 배고파.”



 이민혁이 주제를 바꿨다. 제 여자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기 시작한 날부터 이민혁은 매일 배가 고프다고 징징거렸다. 평소의 반밖에 안 먹는데 안 고플 리가. 그러게, 그냥 내숭떨지 말라니까. 이민혁이 배고프다고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한마디 했다. 항상 똑같은 패턴이다. 다음에 이민혁이 하는 말은,



 “매점 가자!”



 언제나 이것. 빵 사 줘, 일후나. 매점에 도착하면 이민혁은 또 이렇게 말했고, 나는 지갑 거덜 나겠다며 툴툴거리면서도 이민혁에게 빵을 사 줬다. 이민혁의 여자친구는 절대 끼어들 수 없는, 우리만의 시간이었다.





-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면서 나오는데 때마침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이민혁, 이름 석 자에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갖다 댔는데 건너편에선 이민혁의 해맑은 목소리 대신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이민혁이 운다. 인식이 되자마자 놀라서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민혁아, 어디야! 거의 소리를 지르듯 물었더니 울음소리 사이로 겨우 집…, 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아직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당장 달려나갔다.

 이민혁의 집이 그리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신발장엔 이민혁의 운동화 하나만 있었다. 혼자 있으면서 문도 안 잠그고…. 와중에 그런 걱정을 하며 하도 자주 와 이젠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는 이민혁의 방으로 갔다. 이민혁은 아직도 울고 있었다.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꼴이 왠지 모를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평소보다 더 작아 보이는 탓에 당장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다. 둥글게 말린 등부터 팔로 꼬옥 감싸고 있는 다리까지, 전부 내가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라는 이름으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민혁의 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민혁이 울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으니까. 사실 이민혁에게 그 애에 대한 험담을 자꾸 늘어놓았던 이유 중엔 그것도 있었다. 상처받기 전에 얼른 네가 먼저 버리라는 의미였었다. 내겐 네가 가장 소중하니까, 상처받은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아. 당연하게도 이민혁은 나의 마음을 몰랐다.



 “…헤어졌어?”



 이민혁의 울음소리가 잦아든 때쯤에서야 나는 이민혁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으음…, 대답인 듯 아닌 듯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든 이민혁의 눈가가 벌갰다. 그러게, 내가 걔 별로라고 했지? 할 말은 많았지만 막상 우는 이민혁을 보니 평소와는 다르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저 침대 위에 걸터앉아 바라보기만 했다. 이민혁은 스스로 눈물을 닦아내더니 자고 가, 하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민혁은 잠버릇이 심했더랬다. 싱글 침대에서 자면 밤마다 한 번씩 꼭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이민혁의 부모님이 결국 더블 침대로 바꿔 주셨었다. 그 험하던 잠버릇이 사라진 지금에는 내가 가장 많은 덕을 보고 있었다. 이민혁의 집에서 잘 때마다 침대에 나란히 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옆에 있는 이민혁이 신경 쓰여 잘 수가 없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도 이민혁과 나란히 누웠다. 역시나 잠이 오질 않아 그저 어두운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이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평소엔 잘 자던 이민혁도 오늘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민혁은 제 여자친구 때문일 것이다.



 “아니.”

 “……. ”

 “왜?”

 “…민영이는 있잖아,”



 자기 전에 꼭 문자나 전화해 주는 거 좋아하고, 아침에도 문자 하는 걸 좋아해. 학교에서 봐, 이 다섯 글자만이라도. 주말 이틀 중에 하루는 만나는 걸 좋아하고,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로맨스. 스파게티 좋아하고 커피는 별로 안 좋아해. 먹는 것도, 먹는 걸 보는 것도. 옆에서 들려오는 이민혁의 잠긴 목소리는 좋았지만 내용이 이상했다. 계속 민영이가 어쩌고저쩌고. 뭐 어쩌라는 거지. 의아한 눈빛으로 이민혁을 돌아봤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엔 이민혁의 옆모습만 보였다. 천장만 응시하고 있는 이민혁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런 말은 갑자기 왜 해?



 “민영이가 오늘 뭐랬는 줄 알아?”



 이민혁은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딴 소리를 했다. 뭐라고 했는데? 나는 되물었다.



 “네가 좋대.”



 들려오는 덤덤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처음부터 네가 좋았대. 이민혁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짝사랑은 일 년이었지만 사귄 건 겨우 한 달 남짓이었다. 하지만 그 한 달이 내겐 길게 느껴질 만큼 이민혁은 온 신경을 제 여자친구에게 쏟았었다. 고백을 받아줬다며 좋아했던 이민혁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게 보기 좋아서 그땐 그냥 보고 있기만 했었는데, 사실 그 애는 좋아하지 않는 느낌이었었다. 그것을 보며 어떻게 이민혁을 안 좋아할 수 있을까, 그 애의 마음이 이해가 가질 않아 혼자 짜증도 많이 냈다. 복에 겨웠다며 욕도 많이 했다. 이민혁 앞에서 했던 험담과 그 애 앞에서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던 행동쯤은 새 발의 피일만큼 많이. 그 애가 이민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 마음에 내가 있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충격을 받았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길 기다린 건지 조용하던 이민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이상하게, 그래도 네가 밉지 않더라.”

 “……. ”

 “사실 뭐 때문에 슬펐던 건지도 모르겠어.”



 이민혁은 말 한 마디로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곤 했다. 나는 항상 이민혁의 말 한 마디에 추락했고, 또 들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가 한 말을 전해 내 기분을 추락시켰다가, 그래도 밉지 않다며 날 들뜨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부탁이 있어.”

 “……. ”

 “네가 그 애랑 사귀어 줘.”



 다시 추락했다.



 “…왜?”

 “나는 그 애를 1년 동안 짝사랑했고, 그 애는 널 짝사랑했다잖아. 힘든 거란 걸 아니까.”

 “……. ”

 “근데 나는 그 애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이민혁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힘든 건 상관없느냐고.



 “…나도,”

 “응?”

 “…아, 아냐. 아무것도.”



 나도 짝사랑하고 있는데. 그걸 알면, 넌 나를 봐 줄까?





-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정말 싫었지만 나는 그 애의 고백을 거절하지 못했다. 원치 않은 일 일이었다. 그날 이민혁은 처음으로 나와 떨어져 밥을 먹었다. 모든 아이들과 친했으면서도 식당에선 항상 나와 앉았는데, 이젠 같이 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넌 민영이랑 둘이 먹어. 나는 얼굴 보기가 조금 그러네. 이민혁은 당연히 같이 식당에 가려던 나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꼭 걔랑 같이 먹어야 돼? 싫은 마음을 담아 물었지만 이민혁은 단호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먼저 내려가 버렸다. 나는 이민혁과는 다르게 밥을 반만 받지 않았다. 또한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줄곧 제 여자친구만 쳐다봤던 이민혁과는 다르게 그 애를 보지 않았다. 그 애가 앞에 앉아 조잘대든 말든 내 시선의 끝은 오로지 이민혁이었다. 한참이나 떨어져 앉은 이민혁의 뒷모습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시선으로 저를 뚫으면 이민혁은 나를 돌아봐 줄까. 눈이라도 한 번 마주치길 바라는 내 마음을 역시나 이민혁은 몰랐다.

 이민혁이 말했던 대로 그 애는 주말 중 하루는 꼭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그리고 나는 이민혁이 생각나 거절하지 못했다. 사실 만나서 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저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다가 힘들다 싶으면 카페를 가는 게 다였다. 정말 재미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애는 나름 즐거운 것 같았다. 혼자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 대는 걸 보면. 앞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그 애의 목소리를 카페 내의 다른 소음들과 섞으며 스무디만 한 모금 들이켜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이민혁의 문자였다. 누구 문자야? 내가 핸드폰에 시선을 주기가 무섭게 그 애가 말을 걸었다.



 “그냥, 친구.”



 알아서 뭐 하게. 맘 같아선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친구라고 얼버무렸다. 그 애가 무안할까 봐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이민혁 때문이었다. 그 애한테 잘 해 줘, 이민혁의 한 마디 때문에.

 그 애는 나의 무미건조한 반응에도 굴하지 않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봤자 이민혁이 아니면 소용없다는 걸 모르고. 어쨌든 그렇게 삼 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삼 주 동안의 이민혁은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는 것을 빼고는 예전과 똑같았다. 변함없는 사이라고 생각하도록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민혁의 심경 변화에 가장 예민한 나에겐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이 뻔히 느껴졌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물론 나와 이민혁의 사이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그 애에게. 이민혁과 그 애가 헤어진 것에서 끝났더라면, 나와 이민혁은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점심시간마다 매점에 가 이민혁에게 빵을 바치는 즐거움이 없어진다는 건 지금과 다를 바 없겠지만 적어도 둘이서 같이 밥을 먹고, 어쩌면 주말 중 하루는 같이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답답했다. 원래 좋아하지도 않았던 그 애 하나 때문에. 그러던 와중에 이민혁이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물어왔다.



 “요즘 그 애랑은 잘 지내?”

 “…뭐, 네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노력 중이지, 뭐…. 사실 전혀 노력하지 않고 있지만 당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민혁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사귀라고 한 건 분명 나인데, 사실 너희 둘 보면 기분 좀 이상하다.”

 “……. ”

 “근데 중요한 건, 그게 누구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이민혁이 그 말을 하고 난 이후로 나는 그 애를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주 주말엔 아침부터 만나야만 했다.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영화를 보러 갔다. 이민혁이 말했던 대로 그 애는 로맨스 영화를 골랐다. 이민혁은 그런 거 같이 봐줬냐? 그동안 그 애에게 내 마음대로 말하고 싶은 것을 그 애한테 잘 해 줘, 그 한 마디를 되풀이해 생각하며 참았었는데 이젠 참기가 싫어져서 물었다.



 “뭐야, 갑자기 이민혁 얘기가 왜 나와.”



 그 애는 조금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아니 그냥, 이민혁이나 나는 그런 장르 존나 싫어해서.”



 사실이었다. 아, 싫어하는구나. 몰랐어. 그 애는 애써 웃으며 다른 장르로 바꿨다. 그 애가 다시 고른 영화는 얼마 전 이민혁이 엄마랑 보고 왔다며 줄거리를 열심히 읊었던 것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이민혁을 생각했고, 그래서 그 애가 어떻게 영화를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나는 먹지 않았던 팝콘이 죄 사라진 것을 보고 재미없었구나 대충 추측만 했다. 그 애는 이제 점심 먹으러 가자며 날 이끌었다. 여기 크림 스파게티가 맛있어. 메뉴판을 짚으며 말한 그 애에게 나는 또 입을 열었다.



 “이민혁은 그거 같이 먹어줬냐?”

 “너 아까부터 왜 그래?”



 그 애는 조금 짜증이 난 듯했다. 그냥 뭐, 이민혁이나 나는 느끼한 거 싫어하거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알았어, 그럼 너 좋아하는 거 먹어. 잠시 입술을 깨물었던 그 애가 억지로 웃는 것이 티 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류장에 사람 많다. 걸어갈까? 그 애의 제안에 이젠 아예 작정하고 말했다. 이민혁은 같이 걸어가 줬냐? 천천히 옮기던 걸음을 세우며 그 애가 나를 돌아봤다. 이민혁 얘기 그만해. 화난 말투였다. 택시 타고 가. 나는 대답했다.



 “…알았어. 나 혼자 갈게.”



 결국 그 애는 혼자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애가 화를 내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시간 많은데 이민혁이나 부를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월요일, 그 애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올라갔을 때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냥 혼자 식당으로 내려가 이민혁을 찾아 옆에 앉았다. 이민혁도, 이민혁과 같이 앉은 다른 아이들도 모두 놀란 눈치였다. 민영인 어쩌고? 이민혁의 물음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 왔대, 하고 대답했다.



 “정일훈 얼굴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그러게. 생각만큼 어려워 보이지 않네.”



 앞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눈치를 보다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일훈이 좋은 애야, 이민혁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 웃으니 살짝 어색하던 분위기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 애와 있는 것보단, 어떤 형태로든 이민혁과 같이 있는 것이 훨씬 좋았다.





-





 기분이 다시 나빠진 건 하굣길에서였다. 이민혁과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이민혁도 그 애를 발견한 듯 둘이 얘기하라며 나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조금 슬픈 듯한 표정으로 먼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런 이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그 애가 내 시야를 가렸다. 주말에 있었던 일 미안하지 않아? 그 애는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지금 사과하면 없었던 일로 할게. 그 애의 말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미안할 짓 안 했는데, 난.”



 짜악, 시끄러운 소음이 귓가를 때렸다. 돌아간 고개에 어이가 없어졌다. 꽤나 얼얼한 뺨을 감싸 쥐며 멀어져 가는 그 애를 바라봤다. 당장에라도 쫓아가 여자고 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애의 옆을 지나치면서도 그 애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뛰어오는 이민혁을 보고 참아냈다. 야, 괜찮아? 이민혁은 나의 손을 잡아 내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목이 집중된 것이 느껴져 짜증 나긴 했지만 별거 아냐, 하고 이민혁에게 웃어 보였다.

 뭔 말을 했길래 그래? 같이 버스를 타고 내 집으로 따라 들어온 이민혁이 쯧, 혀를 차며 물었다.



 “몰라, 미안할 짓 안 했는데 사과하래.”

 “아팠겠다.”

 “나 걔랑 그냥 헤어지면 안 되냐?”



 어차피 걔 좋아한 적도 없는데. 내가 말하자 이민혁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 부탁 왜 들어 줬어? 나는 대답했다. 그냥, 부탁한 게 너라서. 생각난 대로 뱉은 나의 말에 이민혁은 괜히 눈동자를 굴렸다.

 며칠 동안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교실에 가 봐도 안 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따로 연락을 해 보진 않았다. 다시 이민혁과 둘이서만 밥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이민혁도 그 애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아서 좋았다.

 이민혁은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다며 교실을 나섰고,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나의 팔을 잡아 일으키는 손길이 느껴졌다.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입술에 무언가가 닿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그 애가 시야에 담겼다. 오오~ 조용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 애는 이제 혀까지 넣으려고 했다. 지금 이 상황이 짜증이 나 목에 둘러진 그 애의 팔을 떼고 밀어냈다. 씨발, 뭐 하는 거야. 화가 나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묻자 그 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일훈아, 미안해. 그 애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다 미안해. 다 이해할 테니까 우리 계속 만나면 안 돼? 그 애가 울먹이며 말했지만 딱히 마음이 약해지진 않았다. 그저 입술이 닿았다는 사실이 짜증이 났다. 여자고 뭐고 때릴까, 고민하며 주먹을 쥐고 있는데 그 애가 그 손을 감싸잡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줘, 응?”



 그 순간, 문득 시선이 간 뒷문에서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던 이민혁과 눈이 마주쳤다. 이민혁은 다급히 뒤돌아 사라졌다. 일훈아…, 나를 부르는 그 애는 이제 걸리적거리기만 해서 붙잡힌 손을 뿌리치고 달려나갔다. 그 애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도 않았다.

 어디 갔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미술실로 향했다. 왠지 거기 있을 것 같았고, 정말 그곳에 있었다. 활짝 열린 미술실 문 아래 주저앉은 이민혁은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있었는데,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우는 것 같았다. 아직도 그 애의 입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손등으로 벅벅 닦으며 문을 닫고 이민혁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 애는 어쩌고…. 이민혁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그 애한텐 미안하다고 안 하더니. 이민혁이 여전히 고개를 파묻은 채로 말했다.



 “걔한텐 미안할 짓 안 했다니까.”

 “나한텐 왜 미안한데?”



 와중에도 발끈하며 대답했더니 이민혁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나는 못 한 걸 너는 해서? 한 달 동안 진도 제대로 안 나갔구나, 이민혁의 말에 안도감을 느끼며 마주 보는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전해줄까?”



 이민혁의 무릎 옆으로 팔을 뻗어 턱을 들어 올렸다. 무슨 용기였는지, 젖은 눈을 한 번 마주 보곤 그대로 입술을 대었다. 그 애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부드러운 입술 새를 가르고 혀를 넣어 치열을 훑었다. 가지런한 것들이 느껴졌다. 망설이는 듯 굳어있던 이민혁도 혀를 움직여 섞었고, 우리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턱에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오래도록 키스했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이 아쉬울 정도로 오래. 서서히 눈을 뜬 나와 이민혁의 시선이 얽혔다. 코가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보기가 왠지 부끄러워 눈을 내리깔았더니 이민혁이 살풋 웃었다. 이민혁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한 팔로 나의 목덜미를 감쌌다.



 “정말 그대로 전한 거 맞아?”

 “…아니. 걔랑은 뽀뽀밖에 안 했어.”



 나도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이민혁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내리깐 시선 끝엔 방금 전까지 나와 닿았던 입술이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이민혁에게 물었다.



 “나 이제 걔랑 헤어져도 돼?”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15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