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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현우] Love and War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는 옆집 남자는 항상 혼자였던지라 그가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은 나를 꽤나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 여자가 수영이라 더더욱. 뭐야, 왜 옆집에서 나와? 수영과 싸웠다는 사실도 잊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눈빛과 누구냐는 되물음 뿐이었다. 장난치지 말고. 나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옆집 남자는 입을 열려 했지만 이내 제게 팔짱을 끼며 말하는 수영의 목소리에 의해 가로막혔다.



 “자기야, 저 인간이야. 아주 비열한 헌 남친.”

 “……. ”



 핸섬가이 젠틀맨 내 새 남친, 옆집 남자에게 나를 소개한 수영이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지만 사실 수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기, 새 남친. 이 두 단어만 빼고.



 “자기야.”

 “……. ”

 “타자, 얼른.”



 걔 자기는 네가 아닌데.












Love and War

김주원X최현우, 태오민혁


* 사랑과 전쟁 - 그녀의 선택 편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 여주 농락 주의 ㅋㅋㅋ (의도했던 건 아니에요...)












 딱, 딱, 고요한 복도에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움직임이 없어 어둡던 공간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소리가 뚝 끊겼다. 내 앞에서. 고개를 들자 발소리의 주인인 옆집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현관문에 기대었던 등을 떼고 똑바로 섰다. 나의 눈을 따라 위로 올라오는 고개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비켜. 내 집이야.”

 “……. ”



 하지만 싸늘한 눈빛과 말투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비키란 말에도 미동 없는 나를 보며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안 비킬 거야? 남자가 또 한숨을 쉬더니 몸을 돌렸다. 눈앞에 드러난 남자의 뒷모습에 그제야 그의 팔을 붙잡아 입을 열었다.



 “걔가 왜 이 집에서 나왔어?”

 “……. ”



 이번엔 남자가 미동이 없었다. 팔은 잡혔지만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아무 말 않는 남자 때문에 참았던 한숨이 터졌다.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다시 돌려세웠다. 왜 이 집에서 나왔냐고. 화를 누르며 묻는 바람에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남자가 움찔했다. 아, 이 목소리를 남자가 좋아했었던가. 대답 안 해? 또다시 묻자 남자가 입술을 깨물다 입을 열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대답이나 해.”

 “재웠어. 네 집 앞에서 쓰러져서.”



 이제 됐지? 싸늘한 눈빛으로 날 노려본 남자가 제 팔을 붙잡은 내 손을 세게 쳐냈다. 세게 치지 않으면 끄떡도 않는다는 걸 남자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는 팔뚝이 단단하긴 하지만 덩치가 작은 탓에 힘에선 항상 밀렸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힘이 세지진 않는다며 투덜거렸던 남자를 나 또한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가 다시 등을 돌리려 했다.



 “재우기만 했지?”

 “……. ”

 “자기는 뭐야?”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이거였다. 재우기만 한 거 맞지? 그 이상 간 건 아니지? 자기라는 호칭은 뭐야? 진짜는 아니지? 손바닥에 손톱이 눌려 아플 정도로 꽈악 주먹 쥐었다.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으면, 하고 속으로 읊조렸다.







* * *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기분이야.”

 “왜, 또.”



 수영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다행이다 했어. 그동안 불안했거든. 걔가 내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다가 언젠가는 옆집 남자와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내 과거가 들통 날까 걱정됐던 건 아냐. 그 애를 사랑했던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까.



 “앓던 이가 빠져서 시원하다 싶었는데…,”



 이제 수영이와 옆집 남자가 만날 일도 없겠지, 하고 시원해했는데. 수영이와의 이별을 준비해왔던 건 나뿐이었어. 수영이는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거였고. 당연히 수영인 미련이 남았겠지. 나는 수영이가 나와 같지 않다는 걸 잊었던 거야. 바보같이. 내 생일날, 내가 집에 없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수영이가 술에 취해 내 집 앞에서 막 소리 질렀어. 그 소음에 옆집 남자가 나왔고. 그리고…, 같이 잤나 봐. 그 애 집에서. 술에 취했다는 것을 핑계로 내뱉는 나의 진심에 귀 기울여 주던 친구들의 흐릿한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그런 친구들을 흘끔 쳐다보곤 다시 술병 주둥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는데 화가 나더라. 왜 옆집에서 나오느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옆집 남자를 제 새 남친이라 소개하는 거야. 팔짱까지 끼면서. 만날 일 없게 하려고 이별을 준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애가 수영이 회사 신입사원이었더라고. 결국엔 만났던 거지. 내가 몰랐던 사이에, 더 일찍. 헤어진 것엔 후회 없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예전에 그 애가 어땠을지 알 것 같아서 그게 참 후회되더라. 좀 허전하기도 하고….



 “잘 한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다.”

 “미련 남았냐, 그 애한테?”



 어. 헤어진 지 7년도 더 지났어. 내가 버렸고, 그 애는 버림받았지. 그땐 어쩔 수 없었어. 너희도 알다시피 그게 최선이었잖아. 제 자식의 남자 애인에 부모님은 앓아눕기 직전이었고, 그 불똥이 그 애한테 튈 수도 있었으니까. 한순간의 방황일 뿐이었다, 난 게이가 아니고, 여자 애인 사귀는 멀쩡한 남자다, 부모님을 안심시켜야만 했어.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멀리 떠나버렸던 그 애는 몇 달 전에 다시 왔지. 내 옆집으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라. 여자와의 7년 남짓한 연애기간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후로 마음이 변했어. 이젠, 7년간 수영일 사랑한 게 맞았던 걸까 싶기도 해.



 “그런데 정말 어이없는 게 뭔지 알아?”



 그 애가, 수영이랑 사귈 거래.





-





 마구 꺾이는 발목에 힘을 주며 최대한 멀쩡하게 걸었지만 사실 눈앞이 팽팽 돌았다. 두 겹 세 겹으로 일렁이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벽에 기대어 섰다.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미 안에 있던 옆집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와는 달리 멀쩡하고 당당한 모습에 술이 확 깼다. 저절로 닫히려는 문을 다시 붙잡아 열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벽에 기대니 조금 옆으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너는 여전하구나, 생각하는데 목소리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사귈 거야.



 아, 아니구나. 너는 변했구나. 화가 나서 남자의 어깨를 세게 치고 내렸다. 현관문 앞에서 다시 마주쳤지만 나도 남자도 입을 열진 않았다. 집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자니 사랑했던 지난날들이 생각나 속이 답답해졌다. 소파 옆 구석에 놓여있던 프라모델 상자를 열었다.



 -싫다더니, 왜 같이 해?

 -원래 사랑하면 이 정도 취미는 함께 하는 거 아니야?

 -하여튼,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 해요.

 -그래서 좋지?



 사실 프라모델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애가 프라모델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꾸 손에 잡히는 거였다. 그 애의 취미가 아직 그대로일까 궁금했다. 작은 조각을 손에 쥐고 있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다. 조각이 굴러들어간 소파 밑을 보려고 엎드렸다. 어두운 소파 안쪽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며칠 전 수영이 던져버린 반지였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좋은 건 아니고, 그것도 좋은 거지.



 사랑이 아니었다. 수영에게 가야 했다.





-





 익숙한 건물이지만 낯선 기분이었다. 수영의 회사를 이런 마음으로 찾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 멀리서 건물을 나서는 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수영은 이내 내게로 다가왔다.



 “그놈하고 잤어?”

 -그 여자랑 잤어?



 내 앞에 멈춰 선 수영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동시에 그 애가 내게 물었다.



 “대답할 의무 없어.”

 -그게 왜 궁금한데?

 “……. ”

 -그야…,

 “너랑 나, 예전에 헤어졌어. 몰라?”

 -나 너랑 헤어진 거야. 몰랐어?



 이래서 우리가 7년이나 연애할 수 있었던 걸까. 너무 닮아서. 말하는 것마저 이렇게 똑같아서. 분명 수영과 나의 목소리인데도 머릿속에선 나와 그 애의 목소리로 들렸다. 나에게 모진 말을 뱉는 수영, 그 애에게 모진 말로 상처 줬던 나.



 “얘기 좀 해. 할 말 있어.”

 -해명 좀 해 줘.

 “난 더 들을 말 없어.”

 -난 할 말 없어.



 그때 해명을 했어야 했다.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난 정말 너밖에 없다고.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니까 조금만 견뎌주면,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랬다면 지금쯤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난 너밖에 없어.”



 현우야, 난 너밖에 없어.



 “…최악이다, 진짜.”



 그러게. 최악이지, 나?



 “저기, 오늘 선약은 제가 먼저인데.”



 수영의 어깨를 감싸 안는 누군가의 팔이 보였다. 그 애였다. 수영을 바라보는 눈빛이 다정했다. 사귈 거야,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이미 사귀는 사이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해요? 그 애의 물음에 수영이 그 애를 바라봤다. 역시 다정해 보였다.



 “같이 가.”



 그거 알아? 나에겐 지금 네 옆에 있는 그 애가 최악이야.





-





 “걔랑 같이 가서 뭐 했어?”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아니, 사실은 엘리베이터 옆 코너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었다. 밀폐된 공간 안에 우리 둘뿐이었다. 공간은 고요했고, 내 목소리는 분명 들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라보지도 않았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듯 굴었다. 남자가 이사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 한 마디 걸지 않았던 나처럼.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얼른 뒤따라 내려 앞만 보고 걷는 그의 뒤를 쫓았다. 남자는 제 집 도어록을 열었지만 나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그의 손목을 붙잡아 날 볼 수 있게 돌려세웠다.



 “걔랑 뭐 했냐고.”



 화난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마주쳤다가 순간 흠칫했다. 눈물이 눈꼬리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눈 주위가 붉어지고 턱을 떨었다.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누굴 미워하는 거야?”

 “……. ”

 “내가 네 여자친구 건드려서 미워?”



 그 애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무식하게 문질러 닦은 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키스했어. 집 앞에서.”

 “……. ”

 “지난 7년 동안, 그 입술엔 네 입술이 여러 번 닿았을 거니까.”

 “……. ”

 “미안하다. 건드려서.”



 남자가 다시 등을 보이며 도어록을 풀었다. 손가락이 느렸고, 그 조금의 시간 동안엔 버튼이 눌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내 문이 열렸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동시에 침묵이 깨졌다. 그의 팔을 붙잡아 돌리곤 입술을 맞댔다. 7년 만에 닿은 그것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돌려줄게.”

 “……. ”

 “그리고 다시 올게.”



 다른 사람과 연애했던 7년의 시간, 7년 동안 그 사람을 향했다 착각했던 그 사랑. 다시 돌려줄게.





-





 집 앞 놀이터야. 올 때까지 기다릴게. 문자를 보내고 벤치에 앉았다. 점점 깊어져가는 밤이 아까웠지만 고백만을 생각하며 버텼다. 주머니엔 반지가 곱게 들어있었다. 새벽 공기의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 수영이 나타났다.



 “내가 만만해? 차버릴 땐 언제고 뭐 하는 짓이야?”

 “……. ”

 “이러면 내가 감동이라도 할 줄 알았어? 웃기지 마.”



 널 감동시키려고 온 게 아니야.



 “…미안해. 미안하다.”



 그래서 조금 미안해. 7년 동안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것을 이제야 깨달아서 미안해. 나는 널 만나기 전에도, 널 만났던 7년이란 시간 동안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 사람만 바라봐 왔던 거야.



 “숨 막혔어. 네가 싫어서가 아니야.”



 부모님의 압박에 숨이 막혔고, 그래서 그 애를 버렸을 뿐이야. 네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것도 아냐. 이수영이란 사람은, 단 한 번도 사랑으로 다가온 적 없었어.



 “…내가 참 못난 놈이다.”



 널 사랑이라고 착각했다니. 그렇게 널 상처 줬다니. 내가 참 못난 놈이다. 하지만 네게 참 고마워. 내 마음을 알게 해 줬잖아.



 “내 마음을 잊고 있었는데…, 이걸 찾은 순간 깨달았어.”



 잊고 있었던 마음을 깨닫게 해 줘서 고마워. 반지를 내밀며 말했다.



 “정말 후회 많이 했다.”



 현우야, 널 보내고 정말 후회 많이 했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렇게 냉정하게 네 상처에 상처를 더했을까. 왜 돌아온 널 보면서도 말 한 마디 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네가 수영이에게 키스하며 날 떠올리게 될 때까지 널 그냥 내버려 뒀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 이젠 숨기지 않을게.



 “사랑해.”



 사랑해. 현우야.

 

 

 

 

 

 

 

 

 

 

 

 

 

 

15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