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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육민] 사랑과 우정 사이 (For. ㅇㅎㄹ님)

* ㅇㅎㄹ님 생일 기념!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1



 성재가 어릴 적부터 장난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탓에 유치원 원장마저 그의 등원을 꺼릴 정도였던 반면 일훈은 매우 얌전해 웬만해선 눈에 잘 띄지도 않았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그들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일훈은 그 어린 나이에도 성재를 한심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생각은 성재와 함께 자라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또라이 같은 짓을 일삼아 육잘또라는 별명까지 얻은 성재가 가끔 한심했으나 왜 아직도 자신은 그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인지 일훈은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우리 그냥 절교해. 성재가 이렇게 말하면 일훈은 왕따 하기는 싫어, 하고 대꾸하곤 했다.


 “너 존나 싫다.”


 성재는 일훈을 흘기며 중얼거렸지만 사실 성재나 일훈이나 별로 마음에 담아두진 않았다. 그렇게 지낸 지가 십일 년이었다. 둘은 나란히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일훈은 민혁을 만났다.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 탓에 친구라고는 성재밖에 없는 일훈과 달리 민혁은 친화력이 좋았으며 짝이라는 명분으로 일훈과도 가까워지려고 했다. 그렇게 일훈은 친구 한 명을 더 사귀었다. 이 학년 희망 과목도 민혁과 똑같이 써낸 일훈은 그 즈음 민혁에게 성재를 소개해 줬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성재와 일훈은, 친구이자 라이벌인 묘한 관계가 되었다.




2



 서로의 마음쯤이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성재는 대놓고 티를 냈고, 일훈은 눈빛으로 티를 냈기 때문이다. 물론 민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민혁에게 둘은 그저 가장 친한 친구, 딱 그 정도였다.


 “……암튼 그래서 너희 담임 아직도 화 안 풀리셨을걸.”

 “걔 저번에도 비슷한 짓 했다고 하지 않았어?”

 “작년부터 몇 번이나 그랬어. 내가 존나 싫어했는데 새끼가 국어 지지리 못하면 이과나 갈 것이지 왜 문과 오고 지랄.”

 “…이과는 수학이 어려우니까?”

 “그럼 빨리 자퇴를 하던가.”


 내가 너희 담임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 새끼가 그 지랄을 떠니까 너무 짜증 나더라고. 걔 때문에 잠도 못 잤잖아.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구시렁거리는 건 성재였고, 성재와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민혁이었으며,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은 일훈이었다. 무슨 주제로 대화를 하든 셋의 역할은 딱히 변하는 게 없었다. 쉬는 시간은 으레 그렇게 흘렀고, 종이 치면 성재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제 교실로 돌아갔다. 일훈과 민혁은 일 반이고 성재는 육 반이었는데, 복도 끝과 끝에 위치하고 있어 왕복하기 귀찮은 거리인데도 성재는 쉬는 시간만 되면 쪼르르 일 반으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너희 반에 친구 없냐? 어느 날 일훈이 툭 내뱉은 물음에 성재는 너나 나나, 하고 대답했다. 하긴, 네가 좀 가까이하고 싶은 존재가 아니긴 하지. 일훈은 납득했고, 성재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저기, 민혁아.”

 “어?”


 이번 수업 끝나고 잠깐 얘기 좀 해. 민혁은 몇 줄 앞에 앉아 제게 말을 건 여자애를 향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여자애는 민혁의 여자친구였다. 작년 일 학기 끝 무렵이었나, 일훈은 여자친구가 생겼다 이야기했던 과거의 민혁을 떠올렸다. 나 쟤랑 사귀어, 그때 민혁은 그저 흘러가는 말로 무심하게 말했더랬다. 아, 그래? 축하해. 그리고 그때 일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한다고 대꾸했다. 하지만 지금의 일훈에겐 민혁의 여자친구가 가장 눈엣가시였다. 성재와 저를 싫어한다는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짜증 나, 제 여자친구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는 민혁을 보며 일훈은 생각했다.


 “민혁아! 식당 가자!”


 오십 분 뒤, 종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모든 아이들이 밖으로 튀어 나갔고, 교실은 금세 텅 비어 일훈과 민혁, 그리고 민혁의 여자친구 세 명만이 남았다. 민혁은 교과서와 필통을 서랍 속에 넣고 있는 제 여자친구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민혁이 일어서기도 전에 뒷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재는 민혁에게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니, 성재야, 민혁이 여자친구를 힐끔거리며 다급히 손을 빼려 했지만 성재는 가만히 밀려주지 않았다. 이럴 땐 도움이 되네, 일훈은 못마땅함에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펴고 민혁의 서랍에서 지갑과 학생증을 꺼냈다. 다짜고짜 끌고 가는 성재 때문에 민혁은 항상 그것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민혁의 여자친구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일훈을 노려봤지만 일훈은 그저 픽 웃어주곤 성재와 민혁을 뒤따라 나갔다.




3



 미안해, 성재가 끌고 가는 바람에…….

 ……아냐, 괜찮아. 학교 끝나고 저녁쯤에 연락할게.

 그래.

 성재와 일훈, 민혁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매점에 가던 길이었고, 민혁의 여자친구는 교실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민혁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여자친구는 굳은 얼굴로 성재와 일훈을 힐끔거리며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원인 제공을 한 성재는, 속 편하게도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우유를 사 먹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새끼야, 그냥 아이스크림 처먹어.”


 저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성재를 한심하게 바라보려고 했으나…… 결국 속 편한 건 일훈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그게 좋겠지? 나는 아직 크는 중인데 우유까지 먹으면 민혁이랑 네가 너무 슬프겠지……. 성재가 울먹이는 척하며 이상한 소리를 할 때,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끝낸 민혁이 다가왔다. 여자친구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으나 민혁은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면, 제 여자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4



 민혁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삼 교시가 되도록 일훈이 학교에 오지 않아서였다. 거의 모든 수업시간을 잠자기로 보내는 일훈이었으나 이렇게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수업 내용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탓에 책상 아래의 핸드폰을 선생 몰래 힐끔거리며 일훈이 메신저 답이나 문자를 해 주기를 기다렸다.


 “일훈아, 왜 이렇게 늦게 왔…… 너 얼굴 왜 그래?”


 다행히도 삼 교시 종이 울림과 동시에 뒷문이 열리고 일훈이 들어왔다. 민혁은 왜 늦었느냐 물으며 일훈을 바라봤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넘어져서. 일훈이 콧잔등에 붙인 대일밴드를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헉, 아팠겠다…… 잘생긴 얼굴 망가져서 어떡해……. 민혁의 한숨 섞인 말에 일훈은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성재가 큰 소리로 민혁과 일훈을 부르며 들어왔지만 민혁은 일훈에게 정신이 팔려 성재에게 신경 써 주지 않았다. 어휴…… 제가 더 아픈 표정을 지으며 일훈의 뺨에 난 생채기를 조심스레 쓸어내리는 민혁을 성재는 조용히 바라봤다. 그리고 다음날, 성재는 팔에 깁스를 한 채 나타났다. 일 교시에 찾아온 성재의 상태를 보고 민혁은 어쩌다 다쳤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어. 으잉…… 성재는 우는 소릴 내며 깁스 한 팔을 만지작거리는 민혁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고, 어이없다는 듯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일훈과 눈이 마주쳤다.




5



 민혁은 버스로 등하교를 했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성재와 일훈은 자전거를 이용했다. 그래서 민혁은 버스정류장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앉는 것이었다. 물론 성재도 일훈도 불만 따위 없었다. 팔 조심해, 성재야. 쉬는 시간마다 제 팔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도 모자라 헤어질 때까지 제 걱정을 하며 손을 흔드는 민혁에게 함께 손을 흔들어 주는 성재의 표정이 매우 밝았다. 일훈은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멀어진 후 자전거에 올라탔다. 성재는 앞만 보고 걸었지만, 일훈은 얄밉게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굴리며 성재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랜만에 걸어가려니 좀 힘들겠다?”


 일훈이 성재를 비웃으며 말했고, 성재는 그런 일훈을 한 번 노려봐주곤 입을 열었다. 다리 길어서 하나도 안 힘들거든? 아, 그래? 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물었다.


 “팔은 어디다 긁었냐?”

 “아스팔트에. 긁힌 거야, 긁은 거 아니고.”

 “웃기시네.”

 “……. ”


 오구, 관심받고 싶어쪄요? 장난스럽게 비꼬던 일훈은 성재의 째림에 더 얄밉게 웃었다. 사실 그래 봤자 성재나 일훈이나 다를 바 없는데도.




6



 학교에선 사귀는 티 내지 말자고 했던 건 여자친구였다고 민혁이 말했었다. 민혁은 왜 꼭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었고. 일훈은 요즘 들어 민혁의 여자친구가 민혁을 지켜보는 때가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민혁은 불만 가득한 제 여자친구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었다. 민혁에게 성재와 일훈은 그저 친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저게 여자의 직감이라는 것일까. 성재와 일훈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물론 둘 다 제 마음을 누군가 알아버렸다고 해서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친구의 그 시선이 즐거웠다. 네가 그렇게 말해준 덕분에 학교에서의 민혁은 오직 우리 것인걸.


 “민혁아, 정일훈! 나가야지!”


 역시나 뒷문을 통해 들어오며 큰 소리로 민혁과 일훈을 부른 성재는 성큼성큼 다가와 민혁을 잡아끌었다. 민혁은 성재의 손에 이끌려 나갔고, 일훈은 익숙하게 민혁의 운동화를 챙겨 들었다. 이것은 성재와 일훈, 민혁이 함께 다니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온 역할이었다.


 “짜증 나…….”


 저와 민혁의 운동화를 양손에 들고 앞서 나간 둘을 따르려던 일훈은 조그맣게 들리는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민혁의 여자친구가 인상을 찌푸린 채 뒷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하교 후의 민혁에 대해서는 딱히 아는 것이 없으니 민혁이 제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굴고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학교에서의 민혁은 제 여자친구의 말을 심각하게 잘 따랐다. 제 여자친구를 저와 성재 외의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서 사귀는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일훈은 비웃음을 흘리며 빠르게 걸어 나갔다.




7



 나 여자친구랑 깨졌어. 다음날 민혁이 한 말에 성재와 일훈은 당황한 척을 했다. 사실 속으로는 곧 깨질 것 같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왜? 잘 사귀고 있었잖아.”


 잘 사귀고 있기는 개뿔. 민혁이 제 여자친구의 말을 심각하게 잘 지키는 바람에 민혁에게 여자친구 따위 없다고 생각할 뻔했으면서. 지금 민혁은 딱히 슬퍼 보이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도 그리 자주 연락하는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 학년 올라오고 나서부터 쭉 사이 별로였어. 성재와 일훈의 생각이 맞았는지 민혁이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희랑 같이 노는 거 싫다더라고. 이유도 말 안 하고 그냥 무작정 싫다고만. 그래서 별로였어.”

 “……. ”

 “계속 그러니까 나도 짜증 나서 연락 잘 안 했어. 어제도 놀지 말라고 화내길래 그냥 헤어지자고 한 거고.”


 친구 관계까지 관리하는 거 별로거든. 민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랬구나…… 성재와 일훈은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일 뿐이었지만 사실 속으론 방방 뛰며 기뻐하고 있었다. 눈엣가시가 사라졌다니. 무엇보다 요 며칠간 (전) 여자친구의 눈빛이 어딘가 슬퍼 보였었기 때문에 성재와 일훈은 더 기뻤다.


 “난 아무래도 너희가 제일 좋은가 봐.”


 그러니까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민혁의 말에 둘은 그러자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재는 나가기 전, 민혁의 여자친구였던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저를 노려보는 여자애에게 대놓고 비웃음을 흘려주며 성재는 민혁의 손목을 붙잡았다.




8



 “쌤, 저 과목 못 바꿔요?”

 “당연히 못 바꾸지.”

 “왜요?”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니? 머리가 하얗게 샌 학년 부장 선생이 고개를 내저으며 성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 쌤 저 내년엔 일 반 과목 배울래요 네? 네? 선생의 고개를 따라 눈을 맞추려 애쓰며 조르던 성재는 급기야 교무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교무실에 있던 선생들 모두 성재를 잠시 바라봤다가 익숙한 풍경인 듯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워낙에 또라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고, 그런 성재를 선생들 또한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 눈빛을 한 채 세계사랑 일본어 배울 거라며 끊임없이 선생에게 조르던 성재는, 성재야 뭐 해? 하는 익숙한 목소리에 급 조용해졌다. 주저앉은 그대로 고개만 돌려 민혁과 눈을 마주한 성재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하, 그냥……. 멋쩍게 웃던 성재는 부장 선생을 돌아보고는 구십 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나 방금 교무실에서 성재 봤어. 이번 쉬는 시간엔 왜 안 오나 했더니 거기 있더라고.”

 “뭐 하고 있었는데?”

 “몰라, 근데 막 주저앉아 있었어.”


 ……풉, 민혁의 말을 듣던 일훈은 잠시 웃음을 참는 듯하더니 이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왜, 왜? 왜 그랬는지 너 알아? 민혁이 물었다.


 “아, 걔가 며칠 전부터 우리랑 같은 반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라고. 진짜 그거 졸랐나 보네.”


 하여간 그 또라이 새끼. 민혁은 성재가 왜 그렇게 조른 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일훈은 알고 있었다. 민혁의 여자친구가 없어진 지금, 성재의 적은 일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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흒 죄송합니다 망했어요…

그냥 에피소드 형식이라고 생각하고 봐 주시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