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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민/식민] 난파선 01

난파선

섭민식민섭










 거대하고 단단한 문 앞에 선 창섭은 품 안의 긴 상자를 고쳐 안고 노커를 움직였다. 상어의 이빨에 물린 형상을 한 쇠고리는 잘 다듬은 목재로 이루어진 문과 부딪혀 청량한 소리를 자아냈다. 그러자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육중한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창섭을 맞이한 이는 장신의 기사였다. 사실 기사의 감정 없는 눈빛보다 총구가 먼저 그를 반겼지만 창섭의 정체를 확인하고 바로 그것을 치워냈으므로 그는 그것에 겁먹지 않기로 했다. 백구십을 웃도는 커다란 몸집은 곧 옆으로 비켜서 창섭이 들어갈 공간을 내주었다. 창섭의 눈에 휘황찬란한 내부의 모습이 가득 들어찼다. 처음 보는 곳은 아니었으니 얼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물론 창섭은 문지기처럼 문 양옆에 높게 세워진 백금색 조각상과 몇십 걸음은 걸어야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을 듯한 넓은 공간, 문을 기준으로 서쪽 끝에 위치한 보석 박힌 핸드레일, 일 층과 이 층이 하나의 천장을 공유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아주 높은 곳에 매달리게 된 샹들리에를 처음 봤을 때에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성의 내부를 평생 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평민 신분이었지만, 소위 높으신 분들의 사생활 하나하나를 신기해하는 사람이 되긴 싫었다.



 “오, 어서 오시게나.”



 다행히 영주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영주 덕분에 창섭이 사는 곳은 무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큰 마을임에도 비교적 살기 좋은 환경이었고, 적어도 창섭 자신이 느끼기에, 그는 제게 친절하고 인자한 인물이었다. 또한 창섭을 굉장히 신뢰하기 때문인지 마치 귀족을 대하듯 그를 대했다. 항구마을 구석의 낡은 나무 집에서 생활하는 대장장이에 불과한데도. 창섭은 저를 반갑게 맞이하는 영주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안고 있던 상자를 건넸다.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확인해보십시오.”

 “그러지. 물론 자네가 만든 물건이라면 굳이 보지 않아도 마음에 쏙 들 테지만.”

 “마음에 드신다면 영광이지요. 영애令愛의 혼인 예물이라 더욱 신경 썼습니다.”



 상자를 열자 고운 비단에 감싸인 장검이 보였다. 영주는 그것을 만지지는 않고 눈으로 살피기만 했다. 창섭의 말대로 이 검은 제 것이 아닌 제 사위 될 이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창섭은 그가 확인할 수 없는 검집 속을 설명해주었다.



 “날은 강철로 되어 있고, 보시다시피 손잡이 전체에 금 도금을 했습니다. 요청해주신 대로 검집엔 보석을 박아 넣었고, 날과 등이 같은 넓이로 완벽하게 균형을 이뤘습니다.”

 “대단한걸.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겠어.”

 “감사합니다.”



 영주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도로 닫았다. 그때 이 층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인을 위해 곧 마차에 오를 영애였다. 눈부시게 새하얀 드레스와 느슨하게 맨 코르셋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닌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천천히 걸어내려오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고, 창섭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창섭은 삼십 도 정도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이거 너무 불편해 보이지?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어. 그 사람은 나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는데 왜 굳이 이걸 해야 하지? 곧 제대로 조여매야 할 걸 생각하니 너무 끔찍한 거 있지.”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서자마자 종종걸음으로 창섭에게 다가온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영주의 딸은 어렸을 적 굉장한 말괄량이였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말을 붙이고 다녀 영주의 속을 꽤나 썩였었다. 그녀의 인맥이 농노 계층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명색이 영주의 딸인데 격식도 차리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조금 문제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녀와 창섭이 친구가 된 것도 그 시기였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얌전해졌지만 그녀는 제 아버지가 주문한 물건들을 들고 성에 찾아오는 창섭을 볼 때마다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주곤 했다.



 “손님에게 별말을 다 하는구나.”

 “솔직히 이건 너무 불편하다고요.”

 “알다마다. 그래도 내일까지만 참으렴.”



 어리광을 섞어 칭얼대는 제 딸을 어르고 달래는 영주의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그는 오래전 자신의 아내, 영부인令夫人을 여의고 홀로 두 아들과 막내딸을 돌보며 살아왔다. 물론 유모와 가정교사를 두긴 했지만 부모만 할 수 있는 몫이 있었다. 영주는 코르셋의 불편함과 위험성을 잘 알았는데, 이 영부인이 영주와의 혼인식 날 코르셋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해 바다로 추락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기사가 수영 실력이 아주 훌륭하지 않았더라면 골든타임을 놓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혼인 축하드립니다.”



 부녀의 대화가 끊기자 창섭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녀는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가 낭군님이라 칭하게 될 인물은 해군 사령관의 아들로, 곧 아버지의 뒤를 이을 자였다. 그와 그녀는 항구에서 마주쳤을 때 첫눈에 반해 몇 년의 연애 끝에 혼인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이 마을에서 몇 대째 해군 부대를 이끌어온 가문과 마찬가지로 몇 대째 마을을 통치하는 가문 사이의 사돈 관계는 양쪽 가문의 이익에도, 마을 전체의 결속에도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혼인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더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그러시게.”

 “내일 축제에 꼭 와야 돼! 알겠지?”



 영주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한 창섭은 그녀의 발랄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매일 험한 것을 다루어야 해서, 검댕이 지워질 새가 없는 손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축제가 열릴 내일을, 이 평화로운 항구 마을에선 맞이하지 못하리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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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 곳곳에 세워진 기둥엔 밤을 밝힐 전구가 매달려 있었다. 모든 가게의 불이 켜지고, 거리의 전구 또한 마찬가지로 빛을 내기 시작할 때였다. 조용한 바닷가에서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주 크게 벌어질 축제를 몇 시간 앞둔 마을은 밤이 깊어감에도 조용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그 굉음은 마을의 소란스러움을 순식간에 잠재울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몇 초 간의 정적. 그 후엔 굉음이 빗발쳤다.



 “해적이다!”



 굉음은 대포가 터지며 나는 소리였다.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가게가 순식간에 불탔다. 즐거운 소란스러움이 가득했던 공간에 폭발음과 비명소리가 가득 퍼졌다. 창섭이 대장간의 문을 열고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막 세 번째 대포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창섭은 눈앞에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명을 지르며 제 옆을 빠르게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모두 흑백으로 보였다. 창섭이 정신을 차렸을 땐, 바다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게들은 죄다 대포를 정통으로 맞았거나 옆 가게에서 난 불이 옮겨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바닷가 즈음에서 커다란 함성소리가 들려 옴과 동시에 창섭은 제 대장간으로 뛰어들어갔다.



 창섭은 기사가 되길 바라본 적은 없지만 제가 만든 검을 휘둘러보며 홀로 검술을 익혀 현재는 웬만한 기사보다 실력이 뛰어났고, 아무도 몰래 갈고닦은 그 실력은 이제야 빛을 발했다. 대포를 쏘는 대신 배에서 내려 거리를 활보하며 검과 도끼로 도망가던 사람들을 찔러 죽이는 해적들에게 달려든 창섭 덕분에 그들 중에서도 하나둘 부상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5합을 채 넘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해적 조무래기들을 지나쳐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개는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즐거움에 잠겨 창섭을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몇몇은 스스로 제게 다가오는 희생양을 발견하고 공격했다. 물론 창섭은 그들을 검 몇 번 휘둘러 물리치는 것에 한 술 더 떠 공격받고 있는 마을 사람을 도와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마을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자기희생적인 의도는 아니었다. 창섭이 이 항구 마을에서 친아버지도 아닌 사람의 대장간에 머물렀던 데에는 목적이 있었고, 그는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해적이 되고 싶습니다.”



 이 항구 마을은 나라의 무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고, 그만큼 금전적인 여유도 있는 데 반해 높으신 분들의 텃세가 없어 아주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바다를 떠도는 인간들이 이곳을 넘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창섭은 해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해적이 되고 싶어서. 정확히는 해적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해적선 앞에 도착한 창섭의 시야에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주변의 다른 이들보다 균형 잡힌 듯한 체격에 고고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였다. 창섭은 항구와 배 사이의 거리 덕분에 눈높이가 비슷한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를 제외한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지만 남자는 창섭의 도전적인 눈빛과 비장하기까지 한 말투가 특별하게 느껴진 모양인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같은 샌님이 할 만한 일은 아닌데.”



 남자는 창섭을 향해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시선은 창섭의 얼굴에서 살짝 어긋난 채였다. 남자가 이 배의 선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머리가 남들보다 잘 돌아갔기 때문이다.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남아있는 선원들이 남자의 말에 힘입어 더욱 큰 소리로 비웃음을 날릴 때, 남자는 창섭이 든 검에 집중했다. 둘 사이의 침묵이 점점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선장님! 거리를 전부 불태웠고 쫓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영주의 성도 털어왔어요. 그런데 저희 쪽도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부상자와 사망자가 몇 명……,”



 창섭의 뒤로 여러 쌍의 발소리와 굵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돌아본 창섭을 보는 순간 끊어지고 말았다. 살인지 근육인지로 퉁퉁한 팔을 가진 거대한 남자는 험악한 인상과 안 어울리게 입을 떡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상자와 사망자를 짊어지고 그의 뒤를 따랐던 다른 남자들 또한 제게 얹어진 동료와 창섭, 그리고 창섭의 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 애들 이렇게 만든 게 너였냐?”



 남자가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씹어뱉듯 말했다. 거의 창섭의 두 배 되는 몸집을 가진 이가 당장이라도 뼈를 으스러뜨릴 듯 위협했음에도 창섭은 딱히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피가 굳어 빨개진 검을 고쳐 쥐었다. 남자 또한 오른손에 있던 도끼를 왼손으로 바꿔 드니 배 위의 선원들도 어느샌가 비웃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누가 먼저 달려들지 눈치를 보고 있을 즈음, 중저음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성으로 갔던 애들까지 다 온 거 맞지? 다들 올라와.”



 선장인 듯했던 그 남자였다. 그의 말을 들은 남자가 그제야 도끼를 오른손으로 옮기며 창섭을 지나쳤다. 나머지 선원들도 동료를 상처 입힌 이를 한 번씩 살벌하게 노려보며 지나쳐갔다. 창섭은 원래 하얬던 피부가 더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검을 쥐었던 손을 느슨하게 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도 타.”



 선원들의 설명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 영주의 성은 물론이고 해군 부대의 처소도 반격하러 쫓아올 정도로 멀쩡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이들이었으니 정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울 것 같진 않았다. 초토화된 마을을 아주 잠시 돌아봤던 창섭은 이내 남자들의 뒤를 따라 바다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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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AU 너무 끌려서 질렀는데 

내가 쓰는 건 왜 다 오글거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