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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민] 유화가인담柔華佳人談 01

柔華佳人談

육민










 열매 달 보름날(9월 15일), 가을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흐르고, 가을을 담아 푸른 하늘에서 햇살이 적당히 따사롭게 내려앉는 미시未時(13시~15시).



 “운종가는 혼자 돌고 싶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예, 그래서 다섯 걸음 더 뒤에서 걷고 있습니다.”



 포근한 날씨가 기분 좋을 법도 했지만 성재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그는 홀로 상점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가능하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성재는 항상 불만을 품곤 했다. 반쯤 몸을 돌리며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던 성재는 곧바로 들려오는 대답에 미간을 잔뜩 좁혔다. 억양 없는 딱딱한 목소리마저 괜히 거슬렸다. 온몸을 검게 물들이는 것도 모자라 갓으로 얼굴을 가린 데다, 허리춤엔 칼까지 차고 있으니 누가 봐도 몇 걸음 앞의 인물을 호위하는 무사의 꼴이 아닌가. 고작 다섯 걸음 뒤에서 걷는다고 내가 혼자 있는 기분이 들겠느냐…… 성재는 이리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한 채 다시 돌아서야 했다. 호위무사는 언제나 한 걸음 뒤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언젠가 들었던, 방금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딱딱한 그 말투가 떠오른 탓이었다.



 “저기, 나리!”

 “……?”



 뒷짐을 지고 느릿하게 설렁설렁 걷던 성재는 옆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발을 멈추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느 낯선 사내였는데, 아주 밝게 웃고 있는 탓에 그는 순간 제가 아는 사람인가 생각해봐야 했다. 하지만 분명 처음 보는 이였다.



 “나리를 부른 것 맞습니다.”



 사람이 구름처럼 몰리는 곳이라 운종가雲從街인 것인데, 제가 서 있는 의전衣廛 근처에는 ‘나리’라 불릴 만한 사내가 없었다. 자신을 부른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성재에게 낯선 이가 또다시 말을 붙였다. 결국 성재는 몸을 돌려 그 사내의 시선을 마주했다.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인물이 훤칠하니 그 푸른 비단옷이 한층 더 빛나는 것 같습니다. 어제 막 만든 옷이 있는데, 한 번 구경해보고 가심이 어떠신지요.”



 사흘에 한 번씩은 꼭 저잣거리를 둘러보는 것이 성재에겐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지만 그토록 많은 횟수를 기록하면서도 제게 이리 손을 내미는 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성재는 내심 흥미로웠으나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보다 높은 사람을 잘도 붙잡는 것이 소질 있는 장사꾼 같아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는 사내의 뒤를 따르며 저와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선 무사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바깥에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성재를 이끈 사내가 발을 멈추곤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나리 큰일 날 뻔했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는 성재를 돌아보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성재는 사내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맞닿았다. 사내의 눈은 크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저를 향한 올곧은 눈동자는 단단하고 깊어 보여서, 성재로 하여금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습니다.”

 “……. ”

 “…저기, 나리?”

 “……어? …미안, 내 잠시 다른 생각을 했나 보다…… 다시 한 번 말해주지 않겠느냐.”



 그 사람도 단단하고 깊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이어진 생각에 사내의 물음을 잊은 모양이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성재가 사내에게 사과하며 되물었다. 사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나리의 뒤를 밟던 사내를 보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뒤를 밟던 사내라니?”

 “온통 검은 사내였습니다. 허리춤엔 칼까지 있었고요. 갓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지 못하였는데, 이리 밝은 때에 미행하는 사람치고 꽤나 당당하게 걷더군요.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건가 싶어 나리를 부른 것입니다.”



 사내는 싱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제 말을 마무리했다. 그는 하고자 했던 말을 다 한 듯싶었으나 성재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를 몰래 미행할 자가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제 상점을 지키는 장사꾼이 눈치챌 정도로 허술한 자객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정말 만일의 경우로, 그리 당당하게 양반을 쫓아다니는 자가 있었다 한들 사내가 발견하기 전에 제 호위무사가 먼저 그자를 벌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자객 따위는 자신을 해할 수 없었다. 온통 검은 옷에 갓을 쓰고 뒤를 밟는 사내라…… 성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사내가 작게 움찔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혹, 소인이 결례를 범한 것이라면…… 송구하옵니다.”

 “……엉? 아, 아니.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정체가 무어일지 생각하느라 그리했다.”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던 사내는 성재가 손까지 내저어가며 해명을 하자 슬쩍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성재는 어느새 표정을 풀고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 안심한 듯 고개를 든 사내가 다시 한 번 싱긋 웃었고, 성재는 그 미소에 화답하듯 저도 함께 웃어주었다.



 “아무튼 그리 신경 써주었다니 고맙구나.”

 “아닙니다, 나리. 당연한 것을요.”

 “이름이 무어냐?”



 성재의 물음에 사내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나리 앞에서 감히 제 이름을 입에 올려도 되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저 내 은인의 이름이 궁금해 묻는 것이니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성재가 종용했다.



 “…화락할 민旼 붉을 혁赫, 민혁이라 하옵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 ”

 “누가 지어준 것이냐.”

 “……잘 모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아니라는 것만 알아요.”



 아아…… 성재는 할 말이 없어 눈을 도르륵 굴렸다. 단단하고 깊은 눈동자 하나 때문에 추억에 잠겨버려 실수를 하고 말았구나. 모든 이에게는 사정이 있는 법이거늘. 자신을 탓하는 듯한 성재의 표정을 본 민혁이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오래전부터 아프셨던 분들이라 미리 각오하고 있었거든요. 이제 혼자 살아갈 나이가 되었지요.”

 “……. ”

 “친부모님은 아니셨지만 친부모님 같았습니다. 그분들 덕에 걱정 없이 살았으니 전 복받은 놈이죠. 이 의전 또한 그분들이 물려주신걸요.”



 민혁과 마주한 지 한 각刻(약 15분)도 채 되지 않았으나, 성재는 단단하고 깊은 것이 눈동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혁에게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눈동자뿐만이 아니라 말하는 것도, 마음도 단단하고 깊으며 배려심이 있었다. 성재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곳을 다시 찾게 될 것 같다고.





 “너무 오래 계셔 걱정했습니다. 옥체를 소중히 하십시오.”



 의전을 나선 성재의 시야엔 금세 호위무사가 들어찼고, 그는 의전 안을 기웃거리며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를 꾸짖는 듯한 말이었다. 그런 제 호위무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성재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그의 어깨를 붙잡고 머리부터 발까지 눈으로 죽 훑었다. 온통 검은 사내. 허리춤엔 칼을 차고 있고, 갓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리 밝은 때에 당당하게 제 뒤를 밟던 인물이라…… 별안간 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튀지 않고,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무사는 제 주군이 미친 것이 아닐까 잠깐, 아주 잠깐 생각했다.



 “…왜 그리 웃으십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무사의 물음에 제가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먼저 돌아서는 것이었다. 성재의 너른 등만을 보고 있는 호위무사는 알 수 없겠지만, 천천히 의전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성재의 입가엔 또다시 미소가 번져 있었다. 퍽 깜찍한 생각을 하는 아이로구나.



 아이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단단하고 깊은 눈동자가, 그리고 그 마음이 자꾸만 떠올랐다. 단단하고 깊은 사람. 평생에 그런 사람은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아주 가까이에 또 한 명이 있었구나. 게다가 그 아이는 안타깝기까지 했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에서, 제게 웃어 보이는 그 입가에서, 단단하고 깊었던 그 눈동자와 마음에서, 물기가 묻어 나오고 있었음을 성재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 사람과 닮은 눈동자를 가지고서, 더 슬퍼 보이는 사람이라.



 “전하, 이제 그만 침수에 드시지요.”

 “……조금만 더 이리 있을 것이니 다들 이만 가거라.”



 김 내관은 서안에 팔을 베고 엎드린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성재를 더 재촉하려 했으나 이만 나가보라는 호위무사의 손짓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일훈아.”

 “예, 전하.”



 무사 또한 내관의 뒤를 따라 나가려는데, 성재가 문득 그를 불렀다. 곧바로 멈춰 선 그는 성재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성재는 어느새 고개를 들고는 씨익 웃고 있었다.



 “내일은 그 답답한 옷 대신 다른 옷을 입거라. 그곳에 다시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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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제목 유화가인담의 유화가는

민혁이랑 어울릴 것 같은 한자 섞어본 거

부드러울 유, 빛날 화, 아름다울 가

이 글 속의 민혁이 성격이기도 하고…

ㄴ. 말투나 단어 막 틀릴 수도 있어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ㅠㅅㅠ

ㄷ. 함께 썰 풀어주셨던 ㅍㅇㅅ님께 감사의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