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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민] 유화가인담柔華佳人談 02

柔華佳人談

육민










 청색 도포가 미시의 햇살 아래 쨍하게 빛났다. 기품 있는 걸음걸이는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시절부터 지겹도록 배워온 것이라 이젠 완전히 몸에 배어 양반, 혹은 그 이상의 품위를 한껏 내보이고 있었다. 자색 도포를 걸친 호위무사가 그런 성재의 뒤를 따랐다. 왕을 지키는 무사로서 부여받은 의복은 물론이고 삿갓과, 제 분신이나 다름없는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으라 이르던 성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었다. 기품이야 넘치게 있었지만 사실 그뿐, 성재는 한 나라의 왕이라는 신분에 맞지 않게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여 호위무사 일훈을 비롯한 신하들의 걱정을 사곤 했다. 이번엔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셨기에, 일훈은 성재 몰래 소맷자락에 넣어온 단검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대체 제 의복과 칼을 떼어내라 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 같은 호위무사는 목숨 바쳐 전하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알고 계신 겁니까?”

 “너의 존재 이유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말거라. 또한 나는 네가 목숨을 바쳐야 할 만큼 나약하지 않아.”



 한 걸음 뒤에서 들려온 일훈의 물음에 성재는 단호하게 대꾸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본 일훈은 순간 움찔했다. 결례를 범했다. 감히 전하께 무례하게 군 것을 사죄하려 입을 열었으나, 성재는 그저 나란히 걸어야 한다 명하지 않았느냐며 그의 소매를 잡아 끌 뿐이었다.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제 주군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질문엔 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운종가를 누비는 성재와 발맞춰 걷던 일훈이 다시 한 번 말을 붙였다. 첫 번째 질문을 반복해준 무사는 이내 성재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는 것을 발견했다.



 “네 복장을 보며 퍽 깜찍한 생각을 했던 아이가 있어서 말이다.”

 “……. ”



 질문의 의도에 살짝 어긋난 대답이었다. 일훈은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무슨 말이냐 묻지는 않았다. 무언가 기분 좋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듯한 성재의 미소를 본 탓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제가 모시는 왕이 이리 즐거워하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을.



 “어? 나리!”



 잠깐 함께 있었을 뿐인데 이젠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성재는 민혁의 외침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혁은 성재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성재의 옆에 선 일훈에게도 인사를 건넨 민혁의 시선이 다시 성재를 향했다.



 “또 뵙네요, 나리.”

 “실은 그렇잖아도 너를 보러 온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재가 대꾸했다. 민혁은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저를요? 민혁이 되묻자 성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고 당황한 듯한 민혁의 표정을 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성재의 미소를 발견한 일훈은 단번에 눈치를 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퍽 깜찍한 생각을 한 아이’가 눈앞의 바로 이 아이라는 것을.



 “저를 왜…….”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 네가 말한 그 옷을 구경하지 못했더구나. 내 아쉬움이 남아 구경하러 들렀다.”

 “예?”



 성재는 핑곗거리를 미리 만들어뒀던 듯 민혁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아마 이 아이가 보고 싶어 밤늦게까지 침수에 들지도 않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 주군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이러한 감정에 있어서만큼은 안타까울 정도로 감추질 못했다.



 “네가 어제 나를 불러 세우며 내게 어울릴 법한 옷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느냐.”



 민혁은 뻔히 보이는 성재의 마음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그저 성재가 한 말에만 온 신경을 쏟아 생각에 잠겼다. 아아!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민혁이 이내 성재의 말을 이해한 듯 손뼉까지 짝 쳤다.



 “너무 다급하여 아무 말이나 했더니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그저 흘려들으실 줄 알았는데 어찌…….”



 민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 끝을 흐리다가 의전 안을 손짓하며 앞장섰다. 성재는 일훈에게 들어가자 눈짓하며 두 번째로 들어갔고 일훈은 성재의 뒤를 따랐다. 내부는 여느 의전과 다를 바 없었다. 색색깔의 비단과 삼베, 모시가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고, 그곳을 지나쳐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가지런히 진열된 의복들이 보였다.



 “자랑처럼 들리실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제 부모님이 조선 팔도에서 알아주는 의전 상인이셨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미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자주 듣곤 하셨지요.”



 몇 벌의 의복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밝은 빛의 비단옷이 있었는데, 바로 그 앞에 멈춰 선 민혁이 입을 열었다. 저 또한 어머니께 배운 것인데…… 성재는 민혁의 설명을 들으며 도포 자락을 쓸어보았다. 그것은 연한 상아색에 깃과 배래는 마치 하늘과도 같은 색으로 이루어졌고, 하단 구석엔 연분홍색의 작은 꽃과 노란색 나비 하나가 수놓아져 있었다. 궐에 기거하는 이들의 의복에 비하면 단순한 생김새였으나 사실 옷에 전혀 관심이 없는 성재에겐 이 옷이 저 옷이고 저 옷이 그 옷이었다. 그런데 이 소박한 조합의 도포가 마음에 쏙 드는 이유는, 아마 이것을 권하는 이가 민혁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 한참이나 부족한 솜씨입니다. 실은 이것이 제가 완성한 첫 번째 옷인데… 어제는 나리께 급히 핑계를 대느라 감히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리의 고운 용모와 어울리지 않……,”

 “마음에 드는구나.”



 여기저기를 살펴보기만 할 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성재에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설명하자 성재는 민혁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밝으면서도 튀지 않는 색으로 이루어져 내 마음에 쏙 든다. 바느질 솜씨도 아주 훌륭하고.”

 “아…… 감사합니다.”

 “헌데 네가 만든 옷에 그리 자신이 없는 줄 알았다면 그저 흘려들은 척할 걸 그랬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러 온 게 아닌데.”



 성재의 말에 민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모아 쥔 두 손을 꼼지락댔다. 송구하옵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성재에게도 간신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민혁이 아닌 성재였다. 얼굴 한 번 더 보겠다고 만들어낸 같잖은 핑곗거리로 되려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절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자꾸 그에게 실수를 저질렀다.



 “아니, 네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허나 내 말은 진심이고, 이건 내가 사고 싶구나. 네가 만든 첫 번째 옷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으니.”





 결국 제가 입을 민혁의 옷과, 함께 왔던 이의 옷까지 사들고 떠나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혁은 문득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민혁이 기억하기로, 이런 느낌을 주었던 이는 결코 제게 좋은 마지막을 남겨주지 못했다. 흔들리면 안 되는데, 흔들리고 말았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러 온 게 아닌데.’

 ‘네가 만든 첫 번째 옷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으니.’

 


 그의 말이 떠올랐다. 처음엔 그저 호의였다. 제가 그를 불러 세운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인지 오늘도 그와 마주쳤고, 옆엔 벗으로 보이는 양반 나리가 한 분 더 계셨을 뿐 온통 검은 사내 따위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안심이 되고 반가운 마음에 그를 다시 한 번 부른 것이었다. 그래, 이때까지만 해도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의 말 몇 마디에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양반 자제인 것 같으니 아마 제게 한 말도 그 여유로움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컸고, 어쩌면 예고일지도 몰랐다. 과거의 일이 되풀이될 거라는. 이러면 안 돼, 너는 또다시 버림받게 될 거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든 의복 아래에 주저앉은 민혁이 눈을 꼭 감으며 되뇌었다. 슬픈 일을 겪어서, 마음이 약해졌을 뿐이야.



 궐로 돌아오는 내내 성재는 기분이 좋았다. 슬쩍 고개를 드는 민혁과 눈을 맞추며 씨익 웃어 보였을 때 민혁은 그 시선을 피하며 민망해했었다. 지난 밤, 늦은 시각까지 민혁을 생각했던 그는 제가 그 아이에게 첫눈에 반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슬픔마저 나누고 싶었고, 이것은 이전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단단하고 깊은 눈동자는 옛 추억에 잠기게 만들었으나 실은 과거의 그이는 단지 그뿐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좋아함이란 감정은 분명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부담을 준 것 같구나.”



 가락을 맞추듯 불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길을 걷던 성재가 대뜸 일훈에게 말했다. 다시 봐도 그저 좋기만 해서, 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훈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정네의 모습을 하고 있던 성재를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고개를 내저으며 대꾸했다.



 “부담을 주진 않으셨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걸요.”

 “어제 처음 본 이에게 이런 마음을 품었다고 하니 우습지만, 그 아이의 슬픔까지도 마음이 쓰이는 것을 어찌 감추느냔 말이다.”

 “전하께서는 어릴 적부터 항상 그러셨지요.”



 민혁의 온전한 마음은 민혁만이 알겠지만, 성재가 느끼기에 그는 분명 제 그릇에 비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단단함 속에 슬픔이란 것 또한 공존하고 있을 테다. 본래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성재는 그런 민혁을 모르지 않았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순식간에 그는 제 마음을 빼앗았고, 오늘 일로 성재는 민혁의 슬픔을 꼭 나눠가지고 말리라 다짐했다.



 “지난날들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이다.”

 “예, 알 것 같습니다. 전하가 좋다면 저도 좋지만 정무를 소홀히 하진 마십시오. 전하의 뒤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내 일은 잘 하고 있으니 염려 말거라.”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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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정민이가 아니라 일훈이로.

분량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이름 막 지었는데

스토리 정리하다 보니 호위무사 분량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